역사이야기(세계사, 한국사)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 정치가들을 배출한 엘리트 교육기관

dn-min 2024. 7. 23.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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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들, 정치가들을 배출한 엘리트 교육기관이 있다 조선의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대부분 이곳을 거쳤는데 이곳이 어디인지 한번 알아보자

 

성균관 명륜당

 

조선국립대학교, 성균관

 

조선국립대학교라 부를 수 있는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으로 유교 경전을 가르치고 인재를 양성하던 곳으로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기관이었다 인재로서 아직 성취하지 못한 것을 이루고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고르게 하는 기관을 말한다 그리고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의 인(仁)과 예(禮)의 정신을 가르치는 공간이었으며 유교 경전 및 역사서를 배우고 사서오경, 삼강행실도 등을 공부하였으며 토론도 하였다 또한 성균관은 국가의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이었기에 학생들은 국가 운영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기도 하였다 공부뿐만 아니라 공자를 비롯, 우리나라 성현들의 제사를 지낸 곳이기도 하다

 

조선의 특별한 학교이니만큼 특별한 입학생이 있었는데 정조의 손자이자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다 한나라의 세자까지 입학했던 성균관은 200명을 뽑았는데 선발에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방법으로는 과거시험이다 과거시험을 합격해야만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으며 소과에 합격했던 사람들 중 진사시와 생원시 둘 중 하나만 합격해도 입학이 가능하였고 대과를 치러 합격하고 나면 고위관료로 나갈 수 있었다

 

성균관에 입학하게 되면 먹고 자는 것은 무상제공이었고 노비(반인)를 두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게 일거수일투족 준비해 주고 도와주는 혜택이 있었고 당시 고위직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관시(조선시대에 성균관에서 실시한 문과초시(예비시험))와 과시(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관리로 임용될 수 있고 신분상승의 기회가 주어짐)로 고위관료 진출기회가 많았다 

 

유생들의 하루

 

유생들의 나이는 대부분 30대였지만 10대부터 60대까지도 있었다 이들은 입학을 하게 되면 선배들에게 인사하는 의식이 있었는데 신입생들은 선배들의 집을 방문하여 술과 음식을 대접하며 인사하였다 신방례를 통해 선후배 간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조직내부의 결속의 다지는 역할을 하였다 유생들은 숙소 내 걸려있는 북 울리는 소리와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식사 전에는 제일 먼저 출석체크를 하였고 아침저녁 하루 두 번 출석하여야만 점수가 부여됐다 이렇게 꼬박 300점을 채워야만 유생들에게 별도로 치러지는 관시를 응시할 수 있었다 유생들은 먼저 공부해 와야 하는 부분을 공부하고 선생님에게 확인받기 위해 설명하고 서로 답변하며 자연스레 토론을 함으로써 학습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매일 쪽지시험을 보았고 매일 보는 일강, 열흘에 한번 보는 순제, 월말에 보는 월강, 1월, 3월, 7월, 9월에 보는 절일제로 시험도 무지 많았다 공부하는 범위가 너무 많아 공부하다 죽는 이들도 있어 숙소 내 약방을 두어 유생들을 돌보게도 하였다 3년에 한 번씩 치러지는 대과의 문턱을 넘기 위해 초시, 회시, 전시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이렇게 최종 합격자는 33명뿐이었다

 

출세를 위한 과거시험과 입시비리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인 퇴계 이황도 젊은 시절 과거시험을 3번 연속 떨어졌었다 그 이후 열심히 공부하여 28살에 소과에 합격하고 34살에 대과에 합격하였다 이렇게 어려운 과거시험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출세 할 수 있는 길은 과거시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잘 나가는 집안이어도 합격하지 못하면 고위관직에 올라가지 못했고 가난하더라도 합격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기에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렸던 것이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경쟁이 뜨거워지자 차츰 과거시험에 부정행위가 속출했다 소매에 몰래 적어와 보는가 하면 붓두껍에 숨겨왔다 보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시험관을 금품으로 매수하여 답안지를 고쳐주거나 합격한 시험지를 바꿔치기한다든가 별의별 방법으로 부정행위가 일어났다 조선 숙종 때 최악의 입시비리(기묘과옥)가 일어났는데 고위직 관리와 시험 감독관까지 얽히고설켜 이 해에 합격한 이들을 전면 무효화시켰고 분노한 숙종은 연루된 50여 명의 사람들을 모두 파직을 당했고 유배를 보냈으며 심지어 군대에 까지 보내버렸다

 

주요 현안 해결을 위한 책문과 대책

 

과거시험에 출제된 문제는 시대적 현안에 대해 이론적 근거를 가지고 답을 해야 했기에 이론 지식은 물론 기본 판단력까지 갖춘 인재들을 등용하였다 백성들을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기에 주요 현안을 모르면 안 되었고 주요 현안에 대한 식견과 답안을 작성할 때는 유교경전이나 역사책에 나와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자기 생각을 써내야 했다 왕들이 직접 낸 시험 문제들을 보면 당시 담고 있는 문제, 현안들이었기에 그 시대를 알 수 있었다

 

항상 시대의 정신을 고민하고 실천하려 했던 살아있는 지식인들이 바로 성균관 유생들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는 폐지되었고 근대 교육의 등장으로 유교 교육의 기능도 사라지게 되었지만 조선의 오백 년 역사를 만든 것은 당시 책문(왕의 질문)과 대책(신하의 답변)이 새로운 정책과 방향을 제시하며 나라를 이끌었던 왕과 훌륭한 신하들이 있었으므로 성균관이 존중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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