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세계사, 한국사)

왕이 되기까지 조선 왕세자의 치열 했던 삶

dn-min 2024. 7. 5.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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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세자는 매일같이 새벽 3시부터 밤 9시까지, 태어나는 순간부터 수많은 공부를 해야 했다 이렇게 왕세자가 왕이 되기까지 매일같이 공부하고 암기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단 한명의 왕세자를 위한 교육 시행

 

단 한명 왕세자의 교육을 책임지는 가장 품계가 높은 두 스승과 왕세자 수업을 위해 44명의 사람이 동원된다 왕과 많은 사람들 보는 앞에서 스승들이 내는 질문에 답하고 토론을 이어나가며 불조약통(은 낙제, 는 부족, 은 보통, 은 우수) 으로 성적이 내려졌다 왕세자는 이런 성적표를 매일같이 받았다 왕세자 교육은 태조부터 태종에 이르기까지는 왕위 계승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여서 조선 제3대 왕 태종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시행하게 된다 아버지 이성계가 조선 강국에 공이 컸던 첫째 부인의 자식들을 다 제쳐 두고 둘째 부인이 낳은 막내아들(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한 것이 발단이 된다 왕세자의 정당성을 문제 삼아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위를 쟁취한 태종은 차기 왕권을 위해서 후계자는 똑똑하고 유능해야 된다 생각했다 태종은 후계자를 이상적인 군주로 키우기 위해서는 신하들보다 아는 것이 많아야 했기에 엄하게 공부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1402년 조선 최초로 왕세자 교육을 시작하게 된다

 

왕세자 교육 시점과 단계별 태교 방법, 산실청

 

왕세자 교육 시점은 보통 4살, 5살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만 당시는 어미 뱃속에서 부터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 임신부 태교법 교습서 '태교신기' 책으로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것을 느끼고, 좋은 것을 듣고 생각하는 것들이 태아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생각했기에 어미 뱃속에서부터 교육은 시작된다 특히 왕실에서는 이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도였다 그렇다면 아이를 갖자마자 시작되는 왕실만의 태교방법은 무엇이 있었을까?


왕비가 임신을 알고 나면 옥으로 만든 왕실만의 특별한 책, 경전을 가까이 하게 된다 옥은 몸에 이롭고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색이다 옥판에 새겨진 말씀을 읽는 것으로 왕비의 하루는 시작된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태교가 시작되는 시점은 임신 3개월부터이다 왕비는 중궁전을 떠나 조용한 별궁으로 거처를 옮겨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해야 했다 임신 5개월째가 되면 왕비는 밤낮으로 번갈아 가면서 천자문과 같은 어린이 학습서들을 들어야 했다 임신 7개월 차가 되면 이때부터 식단 관리에 들어간다 잘 챙겨 먹어야 했지만 당시 조선시대 때는 고기 다루는 가공법이나 조리법이 오늘날처럼 발달하지 못하였고 실제로 고기를 먹었을 때 위생 문제로 위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고기반찬을 먹지 못하게 했다 당시 태교 서적들을 보면 고기와 관련된 금기가 많았다 하지만 임신한 왕실 여성이 아침 식전에 꼭 챙겨 먹었던 것이 있었는데 단백질 보충을 위해 고기를 대신해 순두부를 섭취했다

 

산실청이란 조선시대 왕비와 왕세자 빈의 출산을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으로 각 분야에서 당대 최고 실력자들의 어의와 의녀들로 꾸려지고 의녀들은 왕비옆에서 밤낮으로 머물고 어의들 역시 돌아가면서 상시 대기 상태로 일하게 된다 이때 산실청 최고 책임자는 총리에 해당하는 현임 정승 또는 덕망높은 원로 대신이 맡았다 왕비의 건강을 유지하고 무사히 후사를 낳는 일은 조선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나랏일이었다

조선 최고 육아 전문가들과 탄생한 원자의 성장 교육과정

 

아이가 태어나면 왕이 직접 산실밖에 구리종을 쳐서 아이의 탄생을 알렸다 태어난 아기가 처음으로 입는 옷은 비단이 아닌 헌 무명옷이다 무병장수한 고위관리의 어릴적 입었던 무명옷으로 건강하고 똑똑한 기운이 아이에게 잘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헌 무명옷을 입혔던 것이다 이때 왕비가 첫아들을 낳았다면 이는 원자가 되고 원자는 예비 왕세자의 호칭이다 이때부터 왕실 아이들을 키우며 노하루가 쌓인 보모 상궁과 궁녀들, 그리고 대왕대비가 직접 뽑은 젖이 풍부하고 심성이 고운 유모까지, 조선 최고 육아 전문가들이 원자를 키우므로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엄마와 떨어져 지내야 했다 육아 전문가들의 보살핌 속에서 원자가 5살이 되면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킨다

 

이때 원자나 원손의 교육기관으로 만들어진 강학청에서 선생님 두분을 모시고 유교 기초 입문서 소학과 효의 도리가 담겨있는 효경이란 책을 배우기 시작한다 공부하는 책을 통으로 외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되며 남에게 내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잘 암기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곳이기도 했다 한문과 유교경전을 외우면서 매일 아침, 낮, 저녁으로 45분씩 수업을 듣는다 그 외 왕세자의 사회성을 길러주기 위한 교육으로 배동을 선발하여 또래와의 놀이학습으로 감각과 사회성을 키워 나갔다

 

배동 : 왕세자의 사회성을 기르기 위해 선발된 또래 친구들

선발조건 : 조선초에는 공신들 자제들, 그 이후에는 고위 관료들의 자제 중 똑똑한 아이들 중심으로 선발하였다 그리고 연령별로 아이들을 선발하여 선택된 배동들은 어린시절 친구일 뿐 아니라 이후 원자가 왕으로 등극하게 되면 최측근이 될 수도 있었다

 

이렇게 예비 왕세자로 자질을 갖춰 나가던 원자는 8살 전후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정식으로 왕세자로 책봉되며 예비 국왕으로 자신만의 동궁(왕세자의 궁)을 갖게 된다 동궁 침소 근처에 왕세자 전담교육기관 시강원이 설치되고 생활공간과 교육시설이 함께 있다 강학청은 유교에 입문과정을 가르치는 곳이라면 시강원은 한 단계 높은 심화된 유교 교육을 가르치는 곳이다 왕세자가 언제든지 공부할 수 있게 선생님들이 24시간 근무하고 있다 

당시 문안과 시선(글로 배운것을 직접 실천하는 행위)을 왕세자가 제대로 하지 못하면 자질을 문제 삼았을 정도로 중요한 부분이었다 아버지를 비롯하여 왕실 어른들께 문안 인사를 드리고 나면 본격적인 유교 공부가 시작된다 이렇게 정규수업이 끝나면 보충수업으로 낮시간 중에 스스로 스승을 불러 공부하는 소대, 밤중에 침실로 불러 공부하는 야대까지 약 12시간을 공부해야 했다 

 

날마다 암기시험과 싸웠고 어릴때부터 암기한 내용을 추후 왕이 되어 국정을 이끌 때 응용해야 했다 이미 사서오경(논어, 맹자, 대학, 중용, 시경, 서경, 예기, 춘추, 역경)을 암기하고 과거시험을 통해 검증까지 받은 신하들보다는 더 많이 알고 있어야 했기에 무한 반복으로 책을 읽고 외워야 했다 매일같이 수업이 시작되면 전날 배웠던 내용을 시험 봐야 했고 통과해야만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었다 이렇게 매일 암기와 시험, 평가가 반복되는 날들을 보내야 했던 왕세자, 이것이 끝이 아니다 빈 시간을 이용하여 6가지 교양수업 육예 (예절, 음악, 활쏘기, 말타기, 붓글씨, 수학)까지 익혀야 했던 것이다 말 그대로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공부만 해야 했다

 

조선왕조 역사상 왕세자 교육에 가장 집중했던 왕

 

조선왕조 역사상 왕세자 교육에 가장 열을 올렸던 왕은 21대 왕 영조이다 아들 사도세자와 손자 정조는 영조에게 똑같은 교육을 받게 된다 늦은 나이에 얻은 사도세자는 어려서부터 똑똑하고 침착하기가 남달라 비범함을 알아본 영조는 겨우 2살에 최연소 세자로 책봉하면서 파격적인 조기교육을 시작하게 된다 3살부터 시강원 수업을 받고 남다른 학업성취도를 보이는 사도세자에게 점점 기대를 키워가던 영조, 10살이 된 사도세자는 책 읽기보다 말 타고 활 쏘는 걸 좋아했고 완벽한 유교 군주로 키우고 싶어 했던 영조는 세자와 사사건건 부딪히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는 사도세자는 수업도 빼먹고 문안 인사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끔찍한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계속되는 비행에 화가 난 영조는 뒤주를 갖고 와 사도세자를 가두고는 8일 만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조선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세자가 됐고 최악의 실패 사례가 된 경우이다

 

사도세자 뒤를 이어 후계자가 된 인물,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이다 정조는 어렸을 때부터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몸을 단정히 하고 독서를 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렇게 12살이 된 정조에게 영조는 책 읽는 것이 좋은지 싫은지 묻게 된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서 하는 공부였기에 정조는 이후로 단 한 번의 일탈 없이 시강원 교육을 받았고 14살이 되던 해 정조는 조선의 제22대 왕으로 즉위한다 영조의 기대대로 조선의 18세기 부흥을 이끌며 왕세자 교육의 대표적 성공사례이자 성군으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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