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세계사, 한국사)

조선의 5임금을 모시고 세종이 무한 신뢰했던 황희

dn-min 2024. 6. 25.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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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개국 후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추천으로 조선의 관리로 임명되면서 황희는 조선에서의 길고 긴 관직생활이 시작된다 조선의 다섯 임금을 모셨고 특히 태종과 세종의 무한 신뢰를 얻었던 황희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아보자

 

고려말 14살 첫 관직생활, 태종과 세종의 무한 신뢰를 받다

 

고려말 1362년 14살에 첫 관직생활을 시작한 황희는 음서제도(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높은 관직생활을 했거나 국가에 공을 세웠을 경우 그 자손은 과거를 치르지 않고도 관직에 나갈 수 있던 제도)로 일찍부터 관직에 나가 일을 할 수 있었다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정실부인의 소생이 아닌 얼자로 개성에서 태어났다 27살에 과거에 급제하며 개경에서 생도들을 가르치는 성균관 학관이 된다 고려가 멸망하고 새로운 조선이 건국되면서 30세 때 조선 조정에 부름을 받고 성균관 학관으로 복직하게 된다 조선의 왕세자 교육을 담당하는 정 7품 우정자로, 3년 후에는 왕에게 간언을 올리는 정 6품 문하부우습유로 임명된다 승진을 거듭하면서 황희는 능력 있는 관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43세 때 지신사로 임명되면서 전국을 결정하는 일에 깊이 관여하며 왕의 최측근으로 제일 먼저 의견을 나누고 돕는 든든한 조력자가 된다 46세 1408년 한 관리가 자신이 채용되지 못하니 인사비리 아니냐며 논란에 휘말리게 되고 이에 태종에게 처음으로 사직 요청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태종은 황희에게 더 많은 권한을 주며 다음 해 1409년 형조판서에 오르고 조선의 핵심관청인 육조(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에도 임명된다 고위 관직 약 10년 만에 황희는 육조판서를 모두 역임하게 된다

 

육조판서
병조 : 국방부, 군사업무 총괄, 형조 : 법무부 업무, 공조 : 산림 토목공사, 이조 : 관리승진 좌천 등 총괄
예조 : 과거 시험 총괄, 호조 : 나랏돈 관리

 

황희의 유배생활과 세종의 즉위

 

황희와 태종이 세자처분을 두고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을 때 당시 양녕대군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던 태종은 세자가 나이가 어려 실수할 수도 있다며 양녕대군을 두둔한 황희를 세자에게 아부하려는 것으로 오해하고 인생 최대 시련을 겪게 된다 태종은 황희의 관직을 모두 빼앗고 남원으로 유배를 보내버리게 된다 자신에게 다른 뜻이 없음을 보여주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남원에서의 유배생활을 이어가던 중 태종이 양녕대군이 아닌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된다 유배생활 4년 후 1422년 세종의 부름을 받고 관직에 복귀하게 되고 3개월 뒤 자신을 믿고 지지해 준 태종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때 황희 나이 60세, 태종에 이어 세종을 왕으로 모시게 된다

세종 즉위 후 3년동안 지속된 가뭄과 흉년으로 병에 걸리거나 굶어주는 백성들이 많아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세종은 1423년 예조판서였던 황희를 강원도 관찰사로 보낸다 백성들이 힘들 때 곡식을 꿔 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받는 환곡제도가 있었지만 당시 빌려 준 곡식을 돌려받지 못하면 관리에게 파직이나 유배라는 큰 벌을 주었기에 관리들은 곡식을 돌려받지도 않았는데 받았다며 허위작성을 하여 곡식 창고가 텅 비어 악순환이 된 것이다 문제의 원인을 파악한 황희는 제일 먼저 가짜장부를 파악하고 강원도의 인구수, 땅의 면적등을 파악하여 대대적으로 조사를 한다 강원도 실태를 알게 된 세종은 바로 쌀을 보내줌으로써 백성들의 삶이 점차 안정되어 갔다 세종은 황희의 능력을 인정하고 무한 신뢰를 보내며 1426년 황희를 우의정으로 임명한다 그리고 1년 후 좌의정으로 또 한 번 승진하게 된다

 

강직하고 청렴하며 능력있는 재상, 가문을 위해서는 정직하지 못했던 황희

 

강직하고 청렴했던 황희가 어느 날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히게 된다 황희가 좌의정으로 승진하기 이전 고위관직자 아들 서달이란 선비가 한 고을을 지날 때 자신에게 인사하지 않았다고 무고한 사람을 때려죽인 사건이다 서달은 황희의 사위이자 형조판서의 아들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황희는 고을 관리를 찾아가 사건은폐를 위한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이 살인사건에 의문을 품은 사헌부가 재조사하면서 결국 숨겨졌던 내막이 모두 밝혀지게 된 것이다 이후 조정에서는 서달에게 장형 100대를 주고 황희는 65세 나이로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당시 세종에게 황희는 면죄부를 줄 만큼 꼭 필요했던 신하였기에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희를 좌의정으로 다시 복직시키게 된다

 

70여 년간 이어진 황희의 정치생활과 마지막


어렵게 좌의정으로 복직한 지 10여 일 뒤 황희의 어머님이 작고한다 ㅡ 당시 조선에서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관직에서 물러나 3년간 무덤을 지키며 여막살이를 해야 했던 것 ㅡ 상을 치르고 있는 황희를 세종은 3개월 만에 조정으로 다시 불러들인다 이에 황희는 나이가 들어 벼슬에 종사하는 것이 어렵다며 사직을 요청하지만 계속된 세종의 부름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황희는 세종을 도와 외교, 경제, 국방 등에 더욱 힘쓰게 된다 그리고 4년이 지난 69세가 된 황희를 영의정으로 삼으며 삼정승을 모두 역임하게 된다 그런데 영의정이 되고 바로 다음 해 황희가 사직을 간절히 청하지만 세종은 은퇴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게 갖은 이유를 대며 73세, 74세, 76세 세 차례 더 사직 요청을 하지만 불허한다 그러던 세종 31년, 황희는 87세가 되어서야 영의정부사 명예직이 주어지며 조정을 물러나게 된다

14살에 시작한 관직생활, 70여년간 정치활동을 해 온 황희는 87세가 되어서야 끝이 난다 세종이 승하하기 4개월 전까지 일을 하다 황희는 1452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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