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세계사, 한국사)

흥선대원군 평범했던 아들을 왕으로 만들다

dn-min 2024. 6. 19.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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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가에서 태어난 인물이 왕이 되면 궁이란 명칭이 붙게 된다 운현궁에서 태어난 고종은 절대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지만 흥선대원군의 은밀한 계책으로 자신의 둘째 아들 이명복을 어떻게 왕으로 만들 수 있었는지 알아보자

 

흥선대원군은 어떤 사람인가?

 

흥선대원군의 이름은 이하응, 고종의 아버지로 1820년 12월 겨울 4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들 사이에서 총명하고 영특했던 흥선대원군은 그림과 글씨를 두루두루 배우게 된다 왕가의 후손이지만 뛰어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중요 자리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은 직계혈통이 아니었고 아들인 흥선대원군 역시 폐위된 사도세자의 증손자로 직계혈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행정 관련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직계 왕실과 가까운 종친부의 실세가 된다 추후 아들을 왕으로 만들면서 국정의 전권을 쥐게 되지만 아들 고종과 며느리 명성황후, 외척세력들과 대립하면서 근대사 흐름에 대처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인물이 된다

신정왕후와 흥선대원군의 은밀한 제안

 

신정왕후와 흥선대원군의 암묵적 제안이 이루어진다 1849년 조선의 24대 왕 헌종이 후계자 없이 승하하자 당시 조정 내 권력을 휘둘렀던 안동 김 씨 가문은 똑똑하고 유능했던 흥선대원군보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리고 능력이 부족했던 철종을 왕으로 세운다 철종이 즉위한 지 10여 년 즈음 1863년 흥선대원군이 그토록 기다렸던 철종의 위중 소식을 전해 듣게 되고 아주 은밀하게 왕실 최고 어른인 신정왕후를 찾아간다 흥선대원군의 제안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인 신정왕후는 대원군의 두 아들 중 수렴청정할 수 있는 나이에 적합했던 12살 이명복을 철종의 후계자로 선택하게 된다 1863년 12월 8일 조선전체에 곡소리가 울려 퍼지며 철종의 승하소식과 동시에 대원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이 왕위에 오른다 조선 제26대 왕 고종이다

 

60여 년간 세도 정치 병인양요 천주교 박해사건

 

60여 년간 세도 정치로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외척세력을 사전에 막기 위해 자신의 며느리 될 사람을 직접 고르게 된다 16살의 여흥민 씨 가문의 민자영(명성왕후)을 며느리로 맞이한다 이뿐 아니라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경복궁을 다시 짓기로 하고 기존보다 더 크게 경복궁을 완성하게 된다 그렇게 내부 단속에 힘쓰던 사이 1866년 중국을 통해 조선에 교역을 요구하며 러시아가 쳐들어 오는 사건이 발생한다 흥선대원군은 이를 막기 위해 적을 이용해 또 다른 적을 제압하는 이이제이 전략을 세우며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러시아 침입을 막아준다면 천주교의 자유를 허락하겠다 조건을 내 걸지만 정치문제에 개입할 수 없다며 거절한다 이에 분노한 흥선대원군은 1866년 조선 역사상 전례 없는 종교탄압을 시행하며 조선의 천주교도 8,000여 명을 처형하고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며 가톨릭 박해사건이 일어난다 흥선대원군의 잘못된 판단으로 프랑스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게 되며 연이은 외세 침략으로 민심을 잃는다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흥선대원군은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내세우며 쇄국정책을 강하게 펼쳐나간다 병인양요가 두 달 만에 끝이 나며 추락한 민심을 되찾고 왕실 권위를 회복하며 대원군은 10년 동안 권력을 이어나간다

 

고종의 친정선언 흥선대원군과의 대립 개화정책 임오군란

 

고종의 친정선언(1873년)으로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고종은 사사건건 부딪히게 되며 반대의 길로 걷기 시작한다 정치선에서 쫓겨나 있던 대원군은 권력을 되찾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하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당시 조정에서는 중요시했던 효를 내세워 대원군을 복귀시켜야 한다며 상소가 올라오지만 그럴 마음이 없었던 고종은 보란 듯이 아버지가 세운 정책과는 정반대인 개화정책을 펼쳐 나간다 이에 고종을 왕위에서 끌어내리려는 역모가 발생, 그 배후엔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배다른 형 이재선인 걸 알게 되고 형은 제주도로 유배 보낸 후 사약을 내렸고 측근 세력들은 능지처참한다 역모사건 1년 후 1882년 신식군대와 구식군대의 차별로 구식군대 가 해고되면서 밀렸던 임금을 저급 불량쌀로 지급받게 된다 이에 군인들이 폭발하며 궁궐을 장악하고 개화정책으로 백성들 역시 생활이 힘들어지자 고종을 폐위하고 명성왕후를 제거하려 군인과 함께 백성들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결국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다시 불러들이게 되고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고종은 아버지에게 전권을 위임하게 된다 9년 만에 돌아온 흥선대원군은 아들이 펼친 개화정책을 다시 뒤집어 버리고 분노하고 있던 백성과 군인들을 달랬으며 이때 민 씨 세력들도 몰아낸다

 

흥선대원군 복귀, 동학농민운동, 조병갑의 횡포, 흥선대원군의 최후

 

흥선대원군이 조정에 복귀하고 한달 후 1882년 7월 청나라 군인에 의해 대원군이 납치되고 고종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다시 집권하지만 조정 내에 청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이에 갑신정변을 일어나고 고종의 권위는 더욱 추락한다 새로운 국면을 모색했지만 변화하는 정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 고종 29년(1892년) 조병갑이 군수로 부임하면서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 말도 안 되는 죄목을 만들어 돈을 걷고 재물을 빼앗았으며 저항하는 사람들은 가차 없는 형벌을 가하였다 백성들은 탐관오리의 처벌과 부패정치, 민생구휼을 청하였으나 조병갑의 횡포는 날로 심해지고 이에 분노한 농민들이 1894년 전봉준을 선두로 동학농민의 봉기가 시작된다 농민군의 기세가 날로 높아지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과 일본이 개입하게 되고 길었던 동학 농민 전쟁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한편 조정 내 입김이 세어진 일본인에게 위기감을 느낀 고종은 왕후와 함께 외부 세력들을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고자 하였으나 눈치챈 일본이 궁에 침입하여 왕후를 시해(을미사변)하고 고종은 감금된다 신변안전을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신하게 된 고종은 실권을 잃었을 뿐 아니라 권위에도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된다

 

을미사변 3년후 1898년 흥선대원군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아들의 얼굴을 한번 보고 싶어 했지만 고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장례식 또한 참석하지 않는다 물과 기름처럼 35년간 앙숙관계를 지속했던 고종과 흥선대원군, 아들의 배웅도 받지 못한 채 1898년 2월 22일 흥선대원군은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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