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내 규장각을 세워 역대 왕들의 글과 책을 수집, 보관하기 위한 왕실 도서관으로 백성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조선을 만들고 학문 깊은 신하들을 모아 경사를 토론하며 학문을 연구할 수 있는 장소로 정조가 세운 기관이다 많은 인재들 중 정조에게 총애받는 인물이 있었는데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 권 이상 책을 쓴 조선후기 문신 실학자 정약용이다
정약용의 집안과 성장기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광주부 마재현에서 부친 정재원과 모친 해남 윤 씨의 4남 2녀 중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난다 조선에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일하는 홍문관 관리였던 부친은 나주 정 씨 가문으로 9대 옥당이라 불리며 다복하고 명망 있는 집안으로 유명했다 정약용이 태어나던 해 임오화변으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일이 발생, 조선 역사상 있을 수 없는 비극이 펼쳐졌고 정치적 입장이 달랐던 노론과 대립하던 남인에 속해 있었던 정재원 가문은 혼란한 정국 속에 화를 당할까 모든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내려오게 된다 한 달 뒤 정약용이 태어난다 아명은 귀농, 호는 다산이다 정약용은 특별한 스승 없이 부친으로부터 학문을 배워 4살에 천자문을 읽고 7살에 한자로 시를 지었다 글과 시 짓기를 좋아하고 과학, 수학에도 능했던 정약용은 시간이 흘러 15살에 풍산 홍 씨 가문의 규수 홍혜완과 결혼하며 집안의 가장이 된다 결혼 한 달 뒤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가 등극하고 배척됐던 남인 인재들을 기용하려는 정조의 뜻에 따라 나라에 부름을 받게 된 부친 정재원은 아들 정약용과 함께 마재마을을 떠나 한양으로 올라오게 된다
한양으로 올라와 공부에 매진, 성균관에 입학하다
한양으로 올라와 실학자 이익을 만나면서 실학에 눈을 뜨고 1783년 22살 밤낮없이 과거 공부에 매진해 소과 진사시,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게 된다 정약용은 소신껏 경서를 해석했고 배운 것을 인용하여 글 짓는 능력도 훌륭했으며 무엇보다 정조가 낸 문제의 의도를 파악하여 알맞은 답을 써낼 줄도 알았다 성균관에 들어온 지 4년이 지난 어느 날 부름을 받고 창덕궁으로 간 정약용은 정조에게서 당시 귀했던 책과 훈련도감을 선물 받는다 이렇게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역량을 키워나간다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천주교가 비난의 대상이 되다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학문, 17세기 전후로 서학과 함께 조선에 천주교가 전해진다 3년 전 23살의 정약용은 이복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조선 최초 천주교 신자)을 만나 천주교를 알게 된다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세 형제는 세례명도 받고 신앙 활동도 이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정약용의 종교활동을 성균관 동기들이 알게 되고 비난의 대상이 되지만 정조의 묵인으로 위기를 넘기게 된다 천주교 때문에 한바탕 홍역을 치른 정약용은 공부에 매진하여 6년 만에 대과 문과에 급제한다 그의 나이 28살, 정조의 큰 신임아래 조정의 요직에 두루 오르게 된다 왕에게 간언 하는 사간원청 정 6품 정언에 임명되고 얼마 후 신하들을 관철하는 사헌부 지평 정 5품에 임명된다 승승장구하며 정조의 오른팔이 된 정약용 그런데 1791년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윤지충, 권상연이 집에 모셔놓은 신주를 태워버리고 제사도 지내지 않는 일이 발생한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로 천주교는 사악한 종교로 취급받게 되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참수형을 당하는 충격적인 일이 발생한다 성리학에 어긋나는 걸 알게 된 정약용은 이때부터 천주교를 멀리하게 된다
부친 상(喪)중 수원화성 건설에 참여 큰 업적을 남기다
부친 상(喪) 중임에도 정조의 부름에 조정으로 올라가 수원화성을 건설을 위한 기초공사부터 설계까지 공사법을 제출하라 명을 받고 이듬해 기초 다지는 법, 성의 규모, 성 쌓는 법, 효율적으로 건축할 수 있는 방법 등을 실어 '성설'을 정조에게 올린다 명나라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도르래로 작동하는 조선판 거중기를 발명하고 지렛대 원리를 이용해 손수레 모양의 유형거와 무거운 것을 높이 들어 올릴 수 있는 녹로를 제작하여 백성들의 수고를 덜어주었고 축성기간과 비용을 아끼며 2년 9개월 만에 수원화성을 완성한다 이후 정조는 해결되지 않은 일, 근심거리, 걱정거리가 있을 때마다 정약용을 찾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벼슬에 있으면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고 수시로 불거진 천주교 문제로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던 정약용은 사직을 허락받고 고향으로 내려오게 된다 돌아온 지 1년 뒤 1800년 2월 정조의 승하소식을 듣게 된다 한달음에 달려가 비통해했던 정약용은 고향과 한양을 오가며 3개월 동안 정조의 상을 치르게 된다
천주교 탄압으로 다시 불거진 형제들의 행보와 업적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신유박해가 일어나며 세 형제가 국문장에 잡혀간다 독실한 신자였던 정약종은 참형을 당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멀리 유배된다 순조 즉위 후 천주교 탄압이 점점 심해지니 차라리 청나라 속국으로 해 달라 청한 정약용의 조카사위 황사영은 참수되고 정약용은 또다시 전라도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더 먼 곳으로 유배된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그동안 공부해 왔던 내용들로 책을 펴내기 시작한다 이때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 개의 훌륭한 책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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