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세계사, 한국사)

최초 조선 여성 소프라노 1호 윤심덕

dn-min 2024. 6. 15.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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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심덕 그녀는 누구인가?

 

윤심덕은 1897년 평양, 가난하지만 정직했던 부모님 사이에서 1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난다 또래에 비해 키가 컸고 명랑한 성격에 목소리도 우렁 찾던 대장부 같은 소녀였다 1907년 10살이 되던 해 윤심덕은 당시 부모님이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교회를 다니면서 신학문을 접하고 사립여학고에 입학하여 서양식 교육을 접하게 된다 윤심덕은 어떤 노래든 한 번만 들으면 다 따라 불렀으며 성가대에서 솔로를 맡을 정도로 실력이 있었다 심덕은 노래뿐 만 아니라 공부도 언제나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였다 모자랄 것이 없었던 윤심덕은 당시 집이 가난하고 동생들도 부양해야 했기에 경제적으로 안정된 직업, 의사가 되기 위해 평양 여고보통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다 하지만 노래에 대한 열망이 더 커 고민을 거듭한 끝에 심덕은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자신의 꿈이었던 음악을 제대로 배워보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성악을 배울만한 곳이 없었고 최종 목적지, 성악의 본고장인 이탈리아로 가고 싶었지만 윤심덕은 돈도 이탈리아에 대한 정보도 없었다 우선 음악학교가 있는 일본으로 건너 가 공부하기로 하고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이 되어 1915년 4월 일본 도착, 도쿄음악대에 입학하게 된다 성악 전공 조선 여학생으로는 최초였던 윤심덕은 실력까지 뛰어나 유학생과 일본인들 사이에 인기와 유명세를 타게 된다

 

김우진과의 만남, 조선 순회공연으로 윤심덕을 알리게 되다

 

김우진과의 만남은 도쿄에서 생활한 지 6년이 지난 어느 날 1921년, 한 친구가 윤심덕을 극예술협회(도쿄에서 문학, 예술분야를 공부하던 조선인 유학생들이 만든 연극단체)로 데려간다 나라를 잃은 슬픔에 빠져있던 조선 민중들을 위로하기 위한 순회공연에 참여할 것을 제안받은 심덕은 공연을 흔쾌히 허락한다 합류 이후 순조롭게 공연 준비가 진행된다 이때 공연 연출책임자는 와세다 대학 영문과 재학 중 연극을 공부하고 있었던 김우진 학생으로 두 사람의 첫 만남이다 고국에서의 첫 무대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이 나고 이들은 부산을 시작해 28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도쿄로 돌아온 심덕은 유학생들 사이에서 더욱 유명해진다 덕분에 조선 사람들에게 생소했던 서양 음악과 윤심덕을 알리는 계기가 된다

 

얼마 후 윤심덕을 짝사랑하던 남학생이 상사병에 걸려 앓아눕고는 입원까지 하게 된다 조국으로 돌아간 청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마음이 심란해진 윤심덕은 다른 남자들과는 조금 달랐던 김우진을 찾아가 복잡한 속내를 털어놓게 된다 이후 윤심덕과 김우진은 어렵고 답답할 때 마음을 터 놓고 얘기할 수 있는 대화상대가 된다 김우진은 목포의 대부호 김성규의 맏아들이며 엄격한 아버지 뜻에 따라 일찍 결혼하여 일본에 유학 온 유부남이다 약 1년 후 1922년 졸업발표회가 열리고 또 한 번 대중들을 사로잡는 윤심덕, 일본에서 유명한 지배인이 전속배우가 돼라 제안하지만 안정적인 미래를 뒤로하고 성악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단칼에 거절한다

 

졸업 후 유명세에 비해 초라한 생활과 점점 지쳐가는 두 사람

 

졸업 후 윤심덕은 1923년 6월 26일 경성의 종로중앙 청년회관에서 첫 데뷔무대를 갖게 되고 공연 후 '신여성'이라는 잡지에서 윤심덕을 여왕이라 표현하며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된다 그런데 인기와 명성과는 달리 심덕은 기뻐할 수만 없었다 출연료가 겨우 교통비, 화장품 값 정도였고 이탈리아로 유학 가기 위한 자금은 쉽게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던 심덕이 27살이 되던 해 공연으로 돈을 많이 번다고 생각한 가족들이 심덕을 찾아와 자신들과 어린 두 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지라며 졸지에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효심이 지극했던 심덕은 무대에 서는 것 외 시간강사, 음악 개인교습까지 밤낮으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지만 한편엔 항상 답답한 마음이다

 

이때 졸업 후 조선으로 돌아와 있었던 김우진도 애정 없는 결혼생활에 자신이 공부했던 극작가의 길을 계속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우진과 심덕은 목포에서 만나 서로를 위로해 주며 밤새 술을 마셨고 이내 둘은 깊은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윤심덕의 스캔들

 

1924년 부모님의 성화 때문에 몇 번 만났던 재력가 김홍기와의 결혼소식이 경성을 뒤흔들지만 심덕의 거절로 혼담은 취소가 된다 그 해 자신의 뒤를 이어 성악을 공부하던 남동생의 유학 소식에 미국까지 가는 배 값을 마련해야 했던 심덕은 자신의 수입으론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어느 날 경성에서 소문난 갑부 이용문이 이 소식을 전해 듣고는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여비를 대어 주겠다며 솔깃한 제안을 한다 큰돈을 구할 뾰족한 수가 없었던 심덕은 며칠을 망설이다 그의 집을 방문해 후원금을 받아오게 된다 그렇게 동생이 유학을 떠난 지 9개월쯤 윤심덕이 첩이 되었다는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에게 비난과 매도를 당하게 된다 심덕은 미쳐 해명할 틈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대중들의 비난을 견딜 수 없었던 심덕은 칩거생활에 들어간다 1년 후 김우진의 응원을 받으며 공연과 배우의 길로 활동하게 되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가장 비극적일 수도 가장 아름다울 수도

 

어느 날 조선총독부에서 전속가수가 되어 일본노래를 부르라 명령하지만 (총독부 전속가수란 노래만 하는 게 아니라 관료들 앞에서 나서는 기생과 다름없었기 때문) 자존심이 상한 심덕은 총독부 명령을 보류한 채 일본 오사카로 떠난다 음반사와 약속한 26곡의 노래를 무사히 마치고는 녹음을 끝낸 심덕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직접 쓴 '사(死)의 찬미'를 부르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약 한 달이 지난 1926년 8월 3일 밤 11시 김우진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함께 배에 오른다 배가 출발하고 5시간이 지난 새벽 4시경, 1등실 객실문이 열린 것을 확인한 직원이 승객을 찾았으나 온 데 간데없고 짐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목격자도 유서도 없이 현해탄 앞바다 한가운데서 김우진과 윤심덕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당시 부잣집 아들로 풍족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모든 걸 내려놓고 일본에서 재회한 두 사람은 잠시나마 해방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죽음을 가장한 도피설이란 추측도 있지만 가장 비극적일 수도 가장 아름다울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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