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세계사, 한국사)

중국 역사상 최초 유일한 여 황제 측천무후

dn-min 2024. 6. 14.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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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살에 황후가 되어 80살 죽을 때까지 무려 50여 년 동안 권력을 휘두른 여황제 측천무후, 통치에 대한 평가는 중국사에 길이 남을 군주라는 점에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본인 스스로 황제로 즉위한 측천무후에 대해 알아보자

 

측천무후의 성격이 드러나는 유명한 일화

 

측천무후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태종이 궁궐 내 여러 후궁들과 함께 말 한 마리를 보러 갔는데 성질이 사나워 길들일 수가 없자 '먼저 철편으로 다그치다 계속 말을 듣지 않으면 그 철편으로 목을 따면 됩니다' 측천무후의 잔인하고 대범한 말에 놀랐던 태종은 이것이 원인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입궁 후 12년 동안 측천무후는 승계도, 자식도 없었다 빼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측천무후는 태종의 총애를 받지는 못한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 시 서예 학문 등 열심히 익혀 자신을 성장시켜 나간다

 

당나라 세 번째 왕 고종황제의 즉위, 측천무후의 계략

 

당나라 세 번째 왕인 이치(고종)가 황제로 등극한다 당 태종의 죽음과 함께 후사가 없었던 후궁들은 당나라 예법에 따라 모두 감업사로 보내져 비구니 생활을 하며 절에서 남편을 기려야 했다 당 태종의 병수발로 후궁들이 돌아가며 병간호할 때 태자와 은밀한 만남까지 가졌던 측천무후는 태종이 죽은 지 1년이 되던 날 아버지 제사를 지내기 위해 감업사를 찾은 고종과 극적으로 재회한다 둘의 잦은 만남으로 측천무후는 고종 황제의 아이를 낳게 되고 한때 아버지의 후궁이었고 비구니 신분이었던 측천무후를 궁으로 데리고 갈 명분을 찾게 된다 당시 개국공신들끼리 권력강화로 맺어진 고종의 베필 왕 황후와 고종은 총애하던 소 숙비의 이간질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소 숙비를 떼어내고 싶었던 황후는 궁 밖에 고종이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녀를 궁으로 들어올 수 있게 고종에게 입궐을 제안한 것이다 선대 황제의 후궁이었고 크게 경계하지 않았던 왕 황후는 자신의 계략대로 고종이 소 숙비에게 소홀해지자 ㅡ 여우를 쫓으려다 호랑이를 데려 온 줄도 모르고ㅡ 황후는 좋아한다 이렇게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은 측천무후는 3등급 정 2품 소의 자리에 오른다 10년 넘게 배운 정치 지식으로 고종에게 조언하니 측천무후에게 점점 의지하게 된다 권력욕심이 있었던 측천무후는 황후자리에 오를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녀가 입궁한 그 해 겨울 예쁜 딸을 낳고 그 딸의 죽음을 이용해 독살하려 했다며 왕 황후와 소 숙비를 같은 죄명으로 몰아 폐위, 별궁에 유폐된다

 

라이벌을 제거한 측천무후, 황후에 책봉되다

 

라이벌을 제거한 측천무후는 655년 황후에 책봉된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2살, 재 입궁한 지 2년 만의 일이다 황후가 된 측천무후는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이들을 모두 숙청하고 왕 황후와 소 숙비도 잔인하게 죽인다 그리고 자신의 4살 난 아들을 태자자리에 앉히며 657년 고종황제를 등에 업고 자신을 반대했던 개국공신들을 대부분 제거하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대신들로 조정을 장악해 나간다 3년 후 고종의 건강이 크게 악화되고 33살 나이에 병으로 정사에 집중할 수 없으니 측천무후의 입김은 날로 강해진다

 

피의 숙청으로 당제국에 황금기를 맞이한다

 

피의 숙청으로 측천무후는 황권을 강화하고 안정된 정치를 시작한다 이를 배경으로 당 건국 이후 영토가 크게 확장되고 실크로드 장악으로 동서 간 문화 교류도 활발해진다 측천무후는 나라발전을 위해 백성들을 농업에 전념케 하고 세금과 노역을 줄여 부담을 덜어주고 농업책을 발간하여 전국에 배포, 민생을 돌 본 결과 곳간이 채워지고 물가가 안정되며 백성들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되어간다

 

40대 후반의 측천무후는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수 있었던 첫째 아들(이홍)과 둘째 아들(이현)을 제거하고 이어 셋째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이때 남편인 고종이 683년 56세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셋째 아들(이철)도 왕위에 오르지만 어머니에 의해 단 2개월 만에 폐위, 유배 보내 버리고 곧바로 막내아들(이단)을 왕위에 올린다 이때부터 그녀는 모든 실권을 장악하며 정사에 관장한다 이에 측천무후가 황제로 즉위하는 결정적 사건이 발생한다

 

684년 9월 서경업의 난으로 중국 최초 여황제 탄생과 최후

 

684년 9월 중국 양저우, 측천무후를 지지해 왔던 고위대신 손자 서경업과 10만 명의 군대가 모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다 측천무후는 이미 반란에 대비하고 있었던 터라 즉각 30만 군대를 보내 반란을 진압하고 자신을 반대하던 자들을 모조리 제거하며 공포정치를 시작한다 반대파들을 제거하고도 여황제가 될 수 있는 명분이 없었기에 새로운 불교경전을 만들어 여황제에 대한 예언을 믿게 한다 문무백관과 수많은 백성들의 민심을 얻는 데 성공하면서 690년 9월 67세의 나이로 여황제로 등극한다 수십 년간 고종을 대신해 당나라를 이끌었던 측천무후는 자신이 세운 주나라에서도 15년간 황제 역할을 누구보다 잘해 나간다 당 태종 때는 혈통, 가문에 따라 벼슬을 얻었지만 주나라는 과거시험을 통해 인재를 등용했고 신분, 지위, 출신 상관없이 실력만으로 등용한다 전국에서 인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인재들과 함께 나라의 황금기를 만든다 측천무후가 82세 되던 해 중병이 들자 재상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셋째 아들 이철에게 황위를 물려준다 황제가 된 이철은 국호를 당나라로 바꾸고 여황제가 다스렸던 주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반란 이후 조용히 물러나 궐에서 칩거하던 측천무후는 '나를 황제라 부르지 말고 황후라 칭하며 자신의 손에 죽었던 왕 황후, 소 숙비 두 집안의 성씨와 관직을 복권하라 자신의 묘비엔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 유언을 남긴다 셋째 아들이 다스릴 당나라가 안정적으로 발전하기 바랐던 것 그리고 훗날 일어날 수 있는 권력 갈등을 없애고 셋째 아들이 다스릴 당나라가 안정적으로 발전하기 바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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